
1.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아줌마들이 있었다. 똑같은 미용실에서 파마를 한 아줌마들은, 대청마루에 앉아 고구마를 깎거나, 커피를 마시곤 했다.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TV 마저 다섯 시 전엔 나오지 않던 그 시절에, 아줌마들은 남편과 자식을 보내고 나면 조금 적막했을 것이다. 그리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점심을 먹어야 했을 테니, 누군가의 집에 모여 수다를 떠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과였는지 모른다. 그것이 우리 집이었고, 십 년이 지나 모두가 가족처럼 느껴질 즈음, K 는 새로 이사를 왔다.
누군가의 집에, 세를 들어 왔다고.
커다란 덩치에 목청은 좋았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이 많은 새댁이었다. 엄마는 그런 K 를 좋아했었다. 된장찌개 끓이는 법과 김치 담그는 법, 자잘한 집안 살림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K 가 처음으로 아이를 낳았을 때는, 마치 당신의 늦둥이처럼 예뻐하였다. 젖을 물고, 입을 오물거리며 커가는 모습들이 자신의 지난 날을 상기시키는 모양이었다. 너도 어렸을 땐 참 예뻤는데. 문을 닫고 들어가는 나를 보며, 입을 삐죽 내밀기도 했던 것 같다.
아이는 내가 봐도 정말 예뻤다. 하얗고 뽀얀 피부에 달걀 같은 얼굴하며, 하얀색 모자를 씌워 놓으니 스머프가 따로 없었다. 아이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 그러나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아이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삼 년이 지나고 사 년이 지나도, 그 흔한 엄마 소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병원에 갔고, K 는 침묵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2.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반에는 우리보다 두세 살 많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키가 커서 항상 제일 뒤에 앉았지만, 머잖아 누구라도 그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수업에 도통 집중하지 못했고, 때로는 선생님을 큰 소리로 불렀기 때문이다. 진만아- 코를 파서 튕기고, 가끔은 괴성을 지르곤 했다. 어머니들은 학업 분위기를 저해한다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항의를 했다지만, 나는 그녀가 별로 싫지 않았다. 정작 나만 하더라도 그 해 여름에, 앉은 자리에서 오줌을 싼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 화장실에 가도 되나요? 손을 들고 물었는데, 그는 좀처럼 보내주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 기회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리라. 두 번 더 물었을 때도 고개를 젓자, 나는 결국 포기하고 바지에 쌌다. 그런 연유로, 나는 다른 아이가 수업 중에 진만이를 부르건,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가 복도를 뛰어 다니건 나만의 세계에 빠져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육 학년쯤 되었을 땐 상황이 더욱 나빠져서, 그녀는 이제 폭력의 대상이었다. 머리 굵은 아이들은 그녀의 가슴을 만지곤 했고, 여자아인 거세게 항의하며 침을 뱉었다. 아이들은 돌을 던지며, 그 모습을 즐겼다. 나는 그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그 때는 그저 그 모든 것들이 일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H 는 그녀의 동생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같은 반이 되었을 때 누군가와 꼭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누군가 지나가는 투로 H 의 누나가 그녀라고 말했다. H 는 꽤나 미남이었다. 곱상한 얼굴에 몸매가 날씬하고, 기다란 손가락으론 미술 연필을 쥐고 있었다. 그에게선 고등학생 특유의 활발함이라거나 무지함 대신, 섬세하고 조용한 기품 같은 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누나의 존재를 묻지 않았다. 일단 초등학교를 다른 곳에서 다녔기 때문에, 같은 학교 출신을 제외하고는 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 했고, 또한 누나의 존재를 묻는 것이 커다란 결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였다. 선생들이 아이들의 머릴 자르고, 또한 엎드리게 한 채로 걷어차는 와중에도, 그것은 마치 투명한 시냇물처럼 나의 고교시절을 평화롭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나는 H 와 누나를, 끝내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3.
언젠가 수업이 끝나고 H 와 나는 함께 집으로 돌아온 적 있었다. 같은 반이라곤 해도 노는 부류가 달라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구는 아니었다. 함께 밥을 먹거나 매점에 가지도 않았고, 농담을 하거나 놀아본 기억도 없다. 그러나 그 때만큼은 무슨 일 때문인지, 우연히 함께 걷게 되었다. 나는 그 날 H 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거리를 걷고, 간판을 보고, 그러다가 헤어져 돌아왔을 뿐이다. H 도 역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상할 만치 평온한. 그래서 더욱 기묘한, 적막감이 들었다. <침묵의 이유 / Nanda>